anxiety and my cosmos

불안은 두뇌 해마(hippocampus)의 앞 부분 편도체(amygdala)가 보내는 알림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일에 대해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해주는 역할인데, 이게 사람에 따라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해서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손에 작은 상처를 보고 세균에 감염돼 손가락이 썩어 들어갈수도 있으니 위험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대뇌의 이성적 판단으로 보면 이런 작은 상처는 괜찮다고 해야 한다.
결국 이 편도체의 과민한 알림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대뇌의 이성적 판단으로 컨트롤해야 한다.
힘들면 세라토닌 같은 약물의 힘을 빌려도 된다.
우리는 아니 나는 불안해 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알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난 앞으로 이렇게 될거야,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그렇게 평탄하지 만은 않다는 걸 나이가 들면서 많이 느낀다.
어쩌면 불확실성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 세상이 아니 정확히는 이 나라가 그나마 치안도 좋고 총칼로 당장 내일의 목숨을 걱정하지는 않아서 불안,걱정 이런것들이 잘 없어야 할것 같은데..
대신 비교,경쟁,돈 뭐 비 물리적 이지만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곤하고 폭력적인 위험 요소들이 크게 차지하는것 같다.
우리는 경쟁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이 경쟁속에서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동적으로 비교하면서 내가 못나 보이는 불쾌한 감정을 찌릿하게 느낀다.
난 괜찮아 그래 지금도 좋아 하는 생각으로 이 불쾌함을 덮으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고 언제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래 요새 난 이런 경쟁과 비교에 대한 두려움, 걱정이 불안으로 자라고 있는것 같다.
급격히 발전하는 AI는 나의 직업을 위협하는것 같고 아이의 학교생활을 보면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는지 다른 아이들 처럼 학원을 더 많이 다녀야 얘가 나중에 뭐라고 해서 먹고 살지 않을까하는 불안함, 솔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불안 들의 원인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날려보라고 조언해주는 사람들이나 약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의 방법은 효과가 있지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 불안은 나의 일부가 아닌가? 나는 오로지 순수한 밝은 에너지로 채워져야 하는가? 마치 이물질 하나 없는 투명한 물처럼,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물결처럼 그런 사람이어야 되는가?
우리는 모두 그럴수 없다. 잘안다. 때로는 잘못을 했고 그 잘못의 무게가 작고 크고를 떠나 우리는 어쩌면 태어난 순간 부터 탁해 질수 밖에 없는 물처럼 다시는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인것 같다.
부처같은 성인이나 이런 사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니 꼭 사념을 버리고 자유로워야 하는가?
우리는 목적이 있나? 잘먹고 잘사는 그런거 말고, 애초부터 자의가 아닌 생명체로 태어나 필멸의 존재로서 우리는 왜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는걸까?
어떤 미스터리 채널 에서는 인간들은 죽어서 우주의 절대적인 유일무이 신의 파편이고 죽으면서 생에 쌓았던 경험을 가지고 신의 일부로 돌아간다고 한다.
뭐 이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주에 비하면 너무 찰나의 순간에 이 작은 생명체가 어쩌면 견딜 수 없는 절망적인 사건들을 경험하게 하는지 신이 있다면 아니면 지금이 시뮬레이션되는 세상이라면 그 신 그 관리자에게 좀 행복하게 살수 있도록 기도,부탁한다.
절대적인 거부할 수 없는 결정론도 생각해보자.
사실 난 이 결정적 우주에 더 끌린다. 경험으로 추론하건데 나에겐 이 세상은 내가 어쩔 수 있는게 아니라 이미 이렇게 저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신의 깊은 뜻이든, 장난이든, 피조물로 의식을 가진 독립된 자아로 생각되지만 크게 보면 작은 부품처럼 딱 그자리에서 이미 결정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로 보인다.
어릴적에는 노력,착함,성실 이런 것들을 교과서처럼 몸에 익혀야 했고 이것이 진리는 아닐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잘 사는것이라고 나도 모르게 주입되어 왔다.
그런데 왠걸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고 알지도 못한 지구의 이곳 저곳의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켜 보면서 우리는 이제 자신있게 재능,환경 이런 태어나면서 부터 갖춰지는 것으로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자는 영양 무리에서 힘없고 뒤쳐진 녀석 하나만 노려 사냥한다. 그러면서 자연히 신체능력이 좋은 영양의 유전자만 다음 세대로 남을 수 있다. 너무 당연한 자연의 경쟁이 인간 사회에서는 재능,환경 이런것들로 무대만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같다.
공부할 머리가 아닌데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고, 결국 머리 좋고 좋은 부자집 친구에게 경쟁에서 뒤쳐질 운명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사회는 부정한다.
이런 현실에 분노하고 어쩔 수 없음에 좌절하고 이로 인한 불투명한 미래의 두려움으로 지금의 불안함을 키우고 있는것 같다.
매일 경제, 정치 뉴스를 보면서 행복한 미래 보다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떠올리며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 혼자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외롭고 치열한 두뇌의 전기 신호들이 스파크를 튀기며 스트레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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